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업적 명량해전
명량 해전(鳴梁海戰)은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6일) 이순신이 직접 지휘하는 조선 수군 함선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함선 330여 척을 전멸에 가깝게 격퇴했던 해전이다. 그 역사적 순간을 되짚어보며, 조선 최고의 해군 지휘자로 추앙받는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전략과 끈기가 어떻게 한반도의 역사를 바꾸었는지 살펴보자.
목차
이순신 장군은 누구인가?
이순신은 1545년부터 1598년까지 살았던 조선 중기의 유명한 무신이다. 본관은 덕수로, 자로는 여해를 사용하며, 그의 시호는 충무였다. 그는 157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다양한 관직을 역임했는데, 이에는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발포진 수군만호, 조산보 만호, 전라남도수사 등이 포함된다. 결국에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하게 된다.
이순신은 그의 생애 동안 여러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특히 임진왜란에서는 뛰어난 지도력과 전술로 일본 해군을 상대로 연이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지휘 아래 '거북선'이라는 독특한 전함을 활용하여 많은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전략적 사고와 끈질긴 의지는 대한민국의 군사 역사에서 빛나는 존재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명성은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에도 계속되었으며, 그에 대한 국가의 인정으로 여러 번의 추증과 추봉을 받게 되었다. 그의 최종 휴식처인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에 위치해 있다.
명량해전의 배경
이순신이 간신배들에게 모함을 받고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서 파직당한 뒤 원균은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다수의 장병과 대부분의 전선을 잃고, 해군 군사력을 대부분 상실하게 된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던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복권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한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될 당시 조선 수군은 지휘 체계의 엉망으로 각종 잡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시작부터 불안한 출발을 하게된다. 게다가 조선 수군에게 남은 전선은 겨우 12척에 불과하였다. 이순신이 1597년 9월 28일 회령포에서 전선 10척을 거두었고, 그 후 2척이 더 회수됨으로써 12척이 남은 전선의 전부였던 것이다. 나중에 명량 해전을 앞두고 또 1척이 김억추, 송여종의 지원으로 추가되어 13척이 되었다.
칠천량의 패전의 손실이 크자 선조와 여러 간신들은 수군을 폐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들에게 장계를 올려 수군폐지를 반대하였다.
그 장계는 다음과 같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 후, 이순신은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수군 재건에 전력을 다했다. 이순신은 음력 8월에 어란포에 나타난 일본 함대를 격퇴한 후, 음력 9월에 일본 함대가 또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음력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해남의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옮겼다.
명량해협(울돌목)에서의 이동
일본 수군은 명량해협을 단숨에 넘어 육군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일본 수군 중 일부는 해적 출신으로 이같이 물살이 빠른 지역에 익숙한 이들은 명량해협에서 이순신이 막는다 하더라도 무리 없이 전개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하지만 명량해협은 수심이 얕아서 배가 항해가 힘들고 양쪽 바닷가와 급경사를 이뤄 물이 쏟아지듯 빠른 조류가 흘렀다. 명량해협 물살에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암초가 솟아 있어 급류로 흐르던 물살이 암초에 부딪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소용돌이치게 되었다.
명량해전의 전개
충무공 이순신은 조선군을 가볍게 보고 있는 일본군을 이용해 그들을 유인하고자 했다. 10월 16일(음력 9월 7일) 벽파진 근처에서 일본 수군의 소함대를 격퇴했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13척뿐임을 알고,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완전히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우수영으로 본진을 옮긴 이튿날 어란진에서 출병한 일본 수군 130여 척이 울돌목으로 접근했다. 중형 군선인 관선(세키부네) 130여 척으로 이루어진 일본 수군은 진영을 짜고 10여 척씩 대열을 맞추며 울돌목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 수군의 진격 방향이 조류의 흐름과 일치하는 순방향이었다.
이를 보고받은 이순신은 즉시 닻을 올리고 울돌목으로 향했다. 이미 적선의 선봉 대열이 통과하고 있는 시점에 즉각적인 포격으로 세키부네 3-4척이 격침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명량을 빽빽이 채운 적을 보고 대부분의 조선 수군은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계속 자리를 지키며 부하들을 독려하였다. 적의 진격이 소강상태가 되자 수군을 정비하고 대포와 화공으로 맞서 싸웠다. 전투 중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포획하고 곧바로 토막 내어졌으며 조선 수군의 사기는 급격히 올라갔다. 반면에, 전투 중에 지휘관이 적군에 의해 참수되고 토막 난 것을 본 일본 수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정오가 되자 점차 조류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조류의 방향이 조선 수군에는 순조(順潮)가 되고 일본 수군에 역조(逆潮)가 되어, 일본 수군에게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 형성되었다. 좁은 해협에 많은 수의 함선을 끌고 왔던 일본 수군에게 급한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배를 운신하며 전열을 정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뒤로 물러나 있던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배까지 합세하여 10여 척의 전선이 모두 모인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을 격파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미 충무공 이순신에 의해서 설치된 철선에 의해 많은 일본 군선이 파손되어 침몰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군감 모리 다카마사는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었고 도도 다카토라는 부상을 당했다. 군감이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고, 총사령관이 부상을 당한 것으로부터, 일본 본대도 전멸에 가까운 큰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330여 척의 대함대는 대부분 침몰하고 물살이 느려지고 바람이 일본 수군 쪽으로 부는 때를 이용해 잔존 함선 10여 척만이 도망갔다.
명량해전의 결과
유시(酉時) 무렵, 전투는 끝났다. 전투에 참여한 일본 수군 총 330여 척 중 30여 척이 초전에 격침되었고, 대형 군선에는 약 100~120명씩 타고 있었으므로 최소 3000여 명의 전사자가 났을 것이다. 반면, 조선군의 전선은 단 하나도 격침되지 않았다. 다만, 몇몇의 전사자들이 생겨 안타까움이 전해졌다. 추가적으로 일본 전선 중 철선과 해류에 휩싸여 침몰하거나 거의 대파당한 함선이 300여 척에 가까웠다.
이 전투는 조선이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전투가 되었다.
당시 일본 수군이 남해안 대부분의 장악하며 전주성에서 조명 연합군을 대파하고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킨다. 일본 육군은 전라도 점령 이후 충청도 진격하여 명나라군과 대치 중인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수륙 병진을 통한 한양 공격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명량해전의 패배로 인해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이 모조리 무산되었다,
명량해전의 승리요인
주요 승리 요인으로는 지형과 조류 변화를 이용한 충무공 이순신의 뛰어난 전략, 전술과 잘 훈련된 병사들이 있었다. 다양한 종류와 다양한 구경의 화포를 사용한 조선 수군에게 백병전 중심의 일본 수군을 상대로 매우 유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 수군 역시 함포를 사용하였으나 조선 수군에 비해 사용이 서툴고 미숙했다. 조선 수군은 백병전에 불리하므로 함포전으로 일본 전선의 근접을 저지했으며 충돌하여 부서뜨리는 당파 전술도 구사했다.
판옥선과 왜선의 비교
일본 수군의 전선은 뱃머리가 뾰족한 첨저선으로 길고 좁은 각재 하나만을 바닥에 깔고 그것을 뼈대로 외판을 붙여나가는 V자형 바닥 형태이다.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바닥이 평평하고 뱃머리가 뭉툭하며, 크기는 일본 수군의 가장 큰 배 보다 조금 크다. 판옥선은 일본 첨저선 보다 배가 물에 잠기는 지점 낮아 전선을 회전시키는 선회 기동에서 물속의 저항을 덜 받는다. 하지만 평평한 바닥은 물 표면에 닿는 면적이 넓어 배의 직진 능력에는 좋지 않다. 암초가 많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우리나라 바다에서 사용하는데 매우 적합했다. 또한 물과 닿는 면적이 넓어 화포를 발사할 때 반동 흡수에 좋았다. 판옥선에서 사용한 나무못은 물을 먹으면서 팽창하여 결합 부위를 견고하게 되었으며, 판자로는 소나무를 사용했다. 소나무 판자는 일본 수군의 삼나무나 전나무 판자 보다 단단하다. 일본 수군의 전선은 쇠못을 사용했는데, 쇠못은 바닷물에 녹이 슬어 전선의 결합 부위가 약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판옥선의 구조는 높이가 높아서 화포의 사거리를 늘리고, 노꾼과 사부를 튼튼한 판옥으로 보호하여 전투에 매우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전선 내부가 넓어 노 한 자루당 4~6명의 노꾼이 커다란 노를 저을 수 있었다. 작은 노를 젓는 일본 수군보다 효율적이다. 판옥선의 돛은 역풍에도 사용할 수 있는 세로돛을 사용했으며 일본 수군은 역풍에 무용지물인 가로돛을 사용했다. 일본 수군의 전선은 오직 진격에만 특화되어 있어 전술적으로 매우 취약했다, 다만 순풍이 불어올 경우에만 판옥선보다 조금 빨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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