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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인연 혹은 악연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인연 혹은 악연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서로 엄청난 적이자 악연으로 조선의 국정을 어지럽히며 망치는데 일조한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서로 악연을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사소한 오해로 인해 서로를 의심하며 악연을 쌓아왔다. 그 둘 사이에 있었던 사건과 오해 또는 진실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로 인해 조선이 겪게 된 아픔까지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목차

     

    흥선대원군은 누구인가?

    흥선대원군 본명은 이하응, 1821년 1월 24일생 한성 출신이다.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며,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아버지이다. 어린 시절 수재였던 그는 추사 김정호의 제자로 들어가 글과 그림을 배웠으며 실력 또한 대단했다고 한다. 그는 1864년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다. 흥선대원군 업적, 정책은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서구 열강의 개항에 반대하는 쇄국정책으로 유명하다. 양반과 기득권의 민폐와 노론의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서원을 철폐하고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였다. 아들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를 직접 간택 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둘의 사이는 극도로 나빠져 서로 축출하기 위한 노력을 반복하였다. 조선의 을미사변을 주도한 협력자 중 한사람으로 거론되며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해 일본과 결탁한 점에 대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명성황후 민씨는 누구인가?

    명성황후 민씨 본명은 민자영이라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고 1851년 11월 17일 생 여주 출신이다. 아버지 민치록과 어머니 한산 이씨 사이에 태어난 딸로 1남 3녀였지만 모두 어린나이에 죽고 거의 무남독녀처럼 외동딸로 자라났다. 그녀는 14세의 나이로 흥선대원군과 대왕대비 조씨의 간택으로 고종의 부인이 된다. 흥선대원군은 본인과 아버지가 여흥 민씨 집안과 혼례를 하여 명성황후 또한 여흥 민씨로 고종의 부인이 된다면 강력한 아군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고종이 성인이 되고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에 여러가지 설화가 있지만 첫 아이와 관련된 설화가 유명하다. 명성황후는 고종8년 첫 아이를 출산 했지만 항문이 없는 아이가 태어나 생후 5일만에 죽고 말았다. 그 이유가 흥선대원군 때문이라고 판단한 명성황후는 그 때부터 엄청난 적개심을 갖기 시작한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갈등(을미사변의 원인)

    1873년 최익현은 고종에게 흥선대원군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그의 정계은퇴를 주장한다. 이는 명성황후와 결탁이 되어 고종을 움직이고 흥선대원군이 물러나는 계기가 된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직후 명성황후 친족들을 조정 곳곳에 배치하여 권력을 다졌다. 1874년 정권 일선에서 물러난 흥선대원군은 사저인 운형궁을 떠나 의정부에 머물고 있었다. 그 시점 명성황후의 양오빠 민승호에게 폭탄 테러가 일어나 일가족이 몰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배후가 흥선대원군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불안함을 느낀다. 1876년에는 경복궁에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한다. 그리고 1882년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에 반기를 들었던 구식 군인들이 임오군란이 일으키며 흥선대원군은 다시 권력은 잡게 된다. 위 사건들을 모두 흥선대원군이 배후라 생각하고 확신한 명성황후는 점점 더 흥선대원군과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반격은 권력을 다시 잡은 지 33일 만에 끝나고 임오군란을 빌미로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군대에게 압송되어 청나라로 끌려가게 된다.

     

    비극적 사건, 을미사변

    이 사건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조선시대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며 일본에게 능욕당한 사건이기도 하다. 1895년 10월 8일 일본군 수비대와 조선군 훈련대가 경복궁에 무력으로 침입하여 명성황후 및 궁중인사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사건이다. 사건이 있기 1년 전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내 친일 인사들을 등용하고 내각을 구성했다. 그 당시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친일 인사의 명성황후 암살 모의가 내부고발자에 의해 밝혀지며 상당수의 친일 관료들이 중앙 정치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일본의 입지는 한없이 좁아지게 되었다. 에이 일본은 앙심을 품고 명성황후 살해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일본은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갈등 상황을 이용하여 조선 내 권력 싸움으로 포장하려 했으나 현장을 목격한 미국, 러시아 외국인들이 외신에 알렸고 각국의 공사관들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나서 일본의 만행이 세계에 알려졌다. 흥선대원군은 을미사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의 친일적인 정치적 입장과 명성황후와의 갈등은 을미사변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직접적으로 사변을 주도하거나 명성황후의 시해에 관여했다는 증거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아 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을미사변의 역사적 판단

    을미사변은 외세의 내정 간섭과 그로 인한 주권의 침해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를 통해 조선의 국제적 위상이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원인은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의 갈등이 국내 정치의 불안정으로 나타냈고 이러한 내부 갈등은 외세의 간섭을 촉발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을미사변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이 자신들의 나라와 문화에 대한 애착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의 근대화 및 독립운동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