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 그의 업적과 과오.
출생부터 어머니를 잃게 되는 불행을 안고 시작된 홍범도 장군의 인생. 살아가는 삶 또한 그를 평탄한 길로 인도 하지 못하였고 도망자의 삶을 살며 찾은 출가 인생에서 많은 깨닳음을 얻는다. 그 후 본격적인 독립운동과 항일 투쟁으로 엄청난 업적을 남기지만 그 업적 마저도 논란거리가 되며 한동안 그의 업적을 칭송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잘 해결 되고 유해마저 국내로 송환된 지금 또 다른 논란거리가 생기며 잠들어 있는 그를 안타깝게 만든다.
목차
홍범도 장군의 독립운동 전의 삶.
1868년 8월 27일생의 홍범도 장군은 양반집 머슴을 하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불행히도 어머니는 출산 후 돌아가셨고 아버지 또한 그가 9살이 되던 해 돌아가셨다. 그 후 다른 양반집에 머슴으로 팔려가게 된다. 머슴으로 살던 생활에 불만을 가지고 인생을 바꿔보려고 군대에 입대 한다. 하지만 상관과의 마찰로 고심하다 결국 하극상으로 상관을 죽이고 탈영하게 된다. 그 후 금강산 신계사로 들어가 중으로 출가를 하게 된다. 신계사에서 승려 지담을 통해 글과 한국사를 배우고 그동안의 무지함을 안타까워했다. 승려 생활 중 비구니 이옥구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임신 시키고 그와 함께 다시 속세로 환속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부인 이옥구와 그의 고향 북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삶은 또다시 역경을 겪게 된다. 제지소에서 일하던 중 임금 때문에 사장과 싸우다 결국 사장을 살해하고 또 다시 도망자가 되어 강원도 산악지대로 숨어들게 된다. 그 곳에서 사냥을 하며 을미의병이 일어나기전 까지 긴 시간을 평범하게 살아가게 된다.
홍범도 장군의 업적
홍범도 장군의 업적은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엄청난 신체조건과 능력 게다가 출중한 사격 실력까지 갖춘 그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항상 주도권을 가지고 격퇴해 왔다. 1895년 을미의병 발생 직후 산에서 생활하며 함께 사냥하던 포수들과 연계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북상하던 유인석 의병대와 연계하여 번번히 일본군을 격퇴 했다. 일본군에게 눈에 가시 같은 홍범도는 신출귀몰하며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투에서 업적을 세웠고 최대 700명까지 예상되는 의병대를 이끌었다고 한다.
하지만 1908년 4월 홍범도의 부인 이옥구는 일본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견디다 끝내 옥사하고 만다. 그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끝까지 남편을 위한 그녀의 일화도 유명하다. 불행은 계속 이어저 장남 홍양순과 차남 홍용환도 의병 활동 중 먼저 전사하게 된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이 되면서 연해주로 망명했고, 블라디보스톡을 거점으로 의병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1920년에는 대한북로군도구 예하 북로 제1군 사령부장으로 선출되어 봉오동 전투를 치르고 청산리 전투에도 참여하게 된다. 이때 김좌진 장군을 만나 같이 엄청난 활약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계속된 일본군과의 충돌로 부득이하게 소련으로 탈출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공산주의자 레닌과 독대한 홍범도 장군은 마우저 권총까지 받은 거물로 성장한다. 1921년 자유시로 이동한 홍범도 장군은 이곳에서 그의 업적을 상쇄시킬 만한 엄청난 일과 맞닥뜨리게 된다.
자유시 참변에 대한 여러 증언
1921년 자유시에서 수많은 독립군이 목숨을 잃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여러 사람들의 증언이 엇갈리게 된다. 사상자가 전혀 없었던 홍범도 장군의 부대와 독립군에 대한 군사재판에 재판관 위원으로 참가하게 된 홍범도 장군을 목격한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홍범도를 배신자라고 매도하기 시작했다.아마도 공산주의자 들과 함께 했던 그의 행적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김일성까지 나서 그를 매도하고 김좌진 장군과의 대립 구도도 그에겐 매우 불리한 여건이었다. 하지만 그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자유시 참변 당시 홍범도 장군은 현장에 없었으며 이미 무장해제를 하고 있어 충돌이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희생을 당한 부대는 김좌진 장군의 부대가 아닌 허재욱이 이끌던 의군부 부대였다. 결정적으로 희생당한 부대는 민간인에 대해 학살과 폭핵, 약탈을 일삼은 범죄 단체로 홍범도 장군은 그들과 이미 손절을 한 상태였다. 이것들은 시간이 오래 지난 후 밝혀진 사실로 그 당시 홍범도 장군을 대변해 줄 만한 거물이 없었다고 한다.
홍범도 장군에 대한 평가
홍범도 장군의 유해 송환시도는 여러 정권에서 시도되어 왔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미뤄 졌고 그중 홍범도 장군의 고향이 평양이라는 이유로 북한이 태클을 걸어 온적도 있다. 소련과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그의 업적을 절하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적의 적은 동료라고 했다. 항일 운동 당시 일본과 소련은 적대관계로 소련은 독립운동가 들에겐 절대적인 우군이라 할수 있었다. 이런 종합적인 상황들을 고려하여 1962년 3.1절 홍범도 장군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수여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2021년 8월 12일 청와대는 카자흐스탄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셔온다는 말을 하고 14일 특사단을 파견 하였다. 이당시 특사로 배우 조진웅도 함께 하여 화재가 되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전례없는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대한민국으로 돌아왔고 2021년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최근 홍범도 장군의 이슈
현재 육군사관학교의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이 논란이 되고 있다. 게다가 필요시 국방부 청사 앞의 흉상도 이전을 검토 하고 있다고 한다. 군의 입장은 장교를 양성하는 기관에 공산주의 활동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되겠느냐는 말이다. 나의 기억에는 홍범도 장군은 공산주의자로서 활동한 적이 없다고 알고 있다. 다만 항일과 일본군을 상대하는 상황에서 개인적인 사상과 관계없이 서로의 이익에 관련되어 함께 했다고 알고 있다. 그것을 후대가 판단하여 홍범도 장군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제발 조상과 유공자를 예우하는 차원에서 이런 일에 정치색이 끼지 않았으면 한다. 이건 대한민국 국민이나 잠들어 있는 독립 유공자들에게 매우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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