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 지역에서 규모 7.9의 엄청난 대지진이 발생합니다. 이를 관동대지진이라 불렀고 이 강력한 지진은 약 14만명의 사망자를 낳았습니다. 이 지진은 일본의 현대사에서도 가장 파괴적인 지진 중 하나로 기억되며, 특히 도쿄와 주변 지역의 대다수 건물이 무너져 강력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목차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대학살
지진이 발생한 후, 무질서와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은 지진으로 인한 피해와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말도 안되는 허위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한다. 이 소문은 조선인들이 화재를 일으키고 우물에 맹독을 퍼뜨렸으며 일본인들을 해치려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기사로 빠르게 퍼진 이 소문은 패닉 상태의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일본의 군경과 민간인들은 이런 허위의 소문을 믿고 조선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습니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수천 명의 조선인이 무차별 학살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로 인해 많은 조선인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습니다.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의 정세
1920년대 초반,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경제적 번영기를 겪었고 중립국으로서 많은 이익을 얻어 이를 통해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부터 경제적인 어려움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세계 경제의 불안정과 국제 경제의 변동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로인해 일본 내 경제는 크게 기울었고 많은 기업들의 줄도산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를 타파할 계책으로 조선인의 폭동을 계기 삼아 화재 전환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조선인 대학살의 주요 인물
미즈노 렌타로
일본 내무대신으로 직접적으로 허위 소문을 만들어낸 장본인으로 조선인을 극도로 싫어 했습니다. 조선 총독부에서 정무총감을 지낼 당시 독립운동가 강우규 의사님이 던진 폭탄에 큰 부상을 당하고 조선인에 대한 반감을 키워왔습니다.
쇼리키 마쓰타로
쇼리키 마쓰타로는 기자들에게 허위 소문을 직접적으로 전달한 사람입니다. 미즈노 렌타로가 당시 경시청 관방담당으로 있던 쇼리키 마쓰타로에게 연락하여 허위 소문을 퍼뜨리도록 지시 하였습니다. 이에 마쓰타로는 기자들에게 허위 소문을 전달하고 기자들은 매우 빠르게 일본 전역으로 허위 소식을 전했습니다.
두 인물 모두, 그들의 행동과 활동이 조선인 대학살을 촉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관동대지진 이후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들의 유언비어와 언론 활동은 무차별 학살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허위 소문 유포 후 상황
루머가 확산됨에 따라, 일본 경찰은 조선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일본인 민간인들이 자경단을 만들어 이러한 유언비어에 편승해 조선인들을 공격하고 학살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조선인들을 모아서 집단 처형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일본 군은 일부 지역에서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학살에 개입했습니다. 그들은 루머를 믿고 조선인들을 "국가의 안보 위협"으로 보고, 이를 이유로 학살을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조선인 대학살을 지켜본 국제사회의 시선
일본의 국내 언론은 대체로 국가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학살의 규모와 성격에 대한 실제 보도가 왜곡되거나 억제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국제사회에 왜곡된 정보가 전달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거주하던 일부 외국인들은 그들이 목격한 비극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이들의 증언은 일본에서의 학살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국제사회에 알려진 실상과 일본의 평판을 뒤집기 위해 일본은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었습니다.
조선인 대학살의 또 다른 희생자 박열
박열은 1923년 10월에 히로히토 황태자의 혼례식 때 폭탄을 만들어 암살을 기도한 죄로 체포되어 있었다. 일본은 국제사회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희생자로 박열을 점찍고 그의 일본 천황의 암살 기도를 조선인 폭동과 연결 지어 재판을 받게 했다. 하지만 항일 정신으로 무장한 박열을 굴복시킬 수 없었고 사형을 받아 영웅이 되려는 그의 계획에 무기징역으로 감형 시켜 22년간 복역을 하는 말도 안되는 수작을 부린다.
바뀌지 않는 일본의 태도
관동대지진 후 발생한 조선인 대학살에 대한 현대 일본 정부의 태도는 복잡하며 여러 정권과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나왔습니다. 일부 학계에서는 사건의 사실을 인정하고 그 잘못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교육과정 및 교과서에서는 이 사건을 크게 다루지 않아,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인 대학살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아직까지도 일본 정부의 구체적이거나 명확한 사과는 없었고 대한민국과의 양국 관계나 다른 정치적 상황에 따라 일본 정부의 반응이나 태도가 다르게 나타나며 이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이 제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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