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준경의 재조명
현대 한국사에서 잊히지 않는 이름 중 하나는 척준경입니다. 그의 무력은 한반도 역사상 최고로 꼽히며, 한국의 '소드마스터'라 불릴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대부분의 명장들이 전략과 전술에 능한 반면, 척준경은 개인의 무력으로 유명합니다.
여진족의 사묘아리, 송나라의 한세충과 동시대에 활약한 그는 그들과 직접 싸운 적은 없지만, 같은 배경에서 비교되어 언급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치적 능력과 식견이 부족하여 이자겸의 난에 가담하고 말년은 유배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지금은 그의 전투 일화가 인기를 끌며 '매우 강력하고 대단한 인물'로 알려졌지만, 한편으로 조선시대에 왕권을 위협한 권신으로 평가받아 평이 좋지 않았습니다. 척준경의 재조명은 이러한 역사적 평가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될것입니다.
목차
척준경의 탄생과 성정
척준경은 황해도 곡산 출신으로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활약했던 시기를 가늠해 보면 1070년 정도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향리이자 곡산 척씨의 시조인 척위공이 아버지였습니다. 고려의 향리는 여러 계급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집안이 가난했던 척준경은 아마도 하급 향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려서부터 학문보다는 무술 연마를 좋아했던 그는 열심히 무술을 단련했지만 그 시절 고려 시대에는 무과가 없어 관리가 되기보다는 동내 무뢰배들과 친해지기 쉬웠습니다. 철이 들어 아버지의 직책을 이어받으려 했지만 여의치 않아 한동안 떠돌이 신세로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척준경은 문종의 3남 계림후 왕희의 계림부 소속 종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1095년 왕희가 숙종으로 보위에 오르면서 척준경은 추밀원 별가 말단 관리로 들어가 왕명 출납, 궁중 숙위, 군기 업무 등을 담당하는 남반으로 지내게 됩니다.
척준경의 전투 활약상
여진 정벌 시작
1104년 2월, 여진족이 정주성을 공격해 오면서 고려군이 대패의 위기에 몰렸을 때, 척준경은 품계도 없는 하급 관리였지만 총사령관 임간에게 말과 무기를 요구해 적장 2명을 전사시키고 추격대를 뿌리치며 정평과 선덕관을 대패의 위기를 막아냈습니다. 하지만 공을 세웠음에도 누군가의 계략에 의해 옥에 갇히는 위기를 맡게 되고, 그때 윤관이 나서 척준경의 목숨을 구해주고 능력을 펼칠 도와주었습니다. 이때 궁중 숙위와 국가 행사에서 의장대 역할을 하던 정8품 문신 관직 천우위 소속 녹사참군사 벼슬을 받았습니다.
석성 전투
윤관이 이끄는 17만 명의 별무반은 진격 도중 함흥 인근 성에서 여진족의 거센 농성에 직면했습니다. 윤관은 여진족의 대응 체계가 강화될 것을 우려해 장군 이관진의 지원 아래 척준경에게 성을 함락시키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척준경은 "장군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며 칼과 방패를 들고 홀로 성벽을 올라가 여진족 추장 처리하는 용맹함을 보였습니다. 그의 활약으로 사기가 오른 고려군은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가한목 전투
병목 지형을 믿고 깊숙이 들어왔던 윤관은 여진 대부대의 기습을 받아 소수의 부하들과 포위되었습니다. 부사령관 오연총이 화살에 맞고 윤관도 위기에 처하자 척준경이 결사대 10명을 이끌고 윤관의 활로를 뚫으려 했습니다. 동생 척준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척준경은 "한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돌격, 여진군 10여 명과 전투를 벌이며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 후 최홍정과 이관진이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해 윤관을 구출했고, 척준경도 무사히 생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에 있어 윤관은 척준경의 행동이 부하로서 본인에게 충성을 다했던 모습임에도 그의 헌신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습니다.
영주성 전투
윤관이 패잔병을 수습해 영주성으로 물러난 며칠 후, 여진의 명장 알새가 군사 20,000여 명을 이끌고 영주성을 공격했습니다. 고려군은 기세가 꺾이고 병력과 군량이 부족해 많은 이들이 농성을 주장했지만, 척준경은 전투에 나서야 한다며 결사대를 이끌고 성을 나섰습니다. 이 전투에서도 또한 용맹한 모습으로 여진군을 몰아내고 적들의 수많은 수급을 취한 척준경은 피리를 불며 개선했습니다. 이를 본 윤관 등 성 안의 장수들은 존경과 용맹함에 감탄하여 척준경을 맞이하며 절을 했습니다. 척준경은 이때까지의 수많은 공을 인정받아 정7품 관직인 합문지후에 임명되었습니다.
공험진 전투
구사일생한 윤관은 분산된 병력을 영주로 소집했습니다. 윤관의 명령에 따라 영주로 모이던 중 권지승선 왕자지는 사현이 이끄는 여진군의 갑작스런 기습에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척준경은 구원에 나섰고 척준경의 구원군이 사현의 군대를 일거에 쫓아 내고 말을 잃은 왕자지를 위해 철갑마 한 필까지 노획해 선물하였습니다.
웅주성 전투
여진군 알새가 수만의 대병력을 동원해 웅주성을 공격했을 때, 최홍정이 이끄는 고려군은 여진군이 자리 잡기 전에 기습해 승리를 거두었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여진군의 포위는 계속되었습니다. 구원군의 도움이 필요했던 최홍정은 척준경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척준경은 구원군을 이끌고 돌아오기 위해 홀로 밧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길주 전투
척준경은 밤중에 홀로 성벽을 내려와 단신으로 포위망을 돌파한 후 정주로 돌아가 병력을 집결시켰습니다. 그들을 이끌고 통태진, 야등포, 길주를 거치며 여진군을 모두 격파한 후, 최종적으로 웅주성 방어군과 연합해 성을 포위한 여진군을 격파하고 웅주성을 구해냈습니다. 척준경은 이 전공으로 상서성의 정6품 관직 공부원외랑에 임명되었습니다.
척준경의 정치관과 성향
척준경은 하급 무관으로 시작해 지속적인 승진을 거듭하며 1117년 서북면병마부사, 1119년 동북면병마사, 1122년 위위경과 직문하성 등 고위 문관직을 역임했습니다. 초기에는 무관으로서 뛰어난 전투 능력을 발휘하며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고, 이후 여진과의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대금 사대를 주도했습니다. 이는 군사 전문가로서 전쟁보다는 화의를 선호한 현실적인 판단이었으며, 여진족과의 지속적인 충돌을 피하려는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윤관과 오연총이 사망한 후, 척준경은 이자겸과 손잡고 권세를 유지했습니다. 이자겸의 지원으로 문관으로서 승승장구하며 1123년 이부상서와 참지정사, 1124년 개부의동삼사 검교사도 수사공 중서시랑평장사 등 고위직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1126년 이자겸의 난에 가담해 반역자로 몰렸고, 동생과 처자식이 화를 입었습니다. 인종의 중재를 무산시키고 궁궐에 불을 지른 후, 자신의 친족을 죽인 자들을 찾아다니며 왕을 침실까지 쳐들어갔지만 인종의 호위 무사에게 패해 퇴각하는 등 정치적으로 과격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인종은 이자겸과 척준경을 이간질시켜 척준경을 회유하는 데 성공했고, 척준경은 이자겸을 제압해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127년 정지상과 김안 등의 탄핵으로 인해 유배되었고, 이후 전라남도 신안의 엄타도로 유배되었다가 고향 곡주로 이주해 말년을 보냈습니다. 인종은 그에게 신하로서의 충절은 잃었지만 사직을 지킨 공로가 있으니 검교호부상서의 벼슬을 내리며 어느 정도의 예우를 했으나, 척준경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등창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척준경의 정치적 행보는 주체적으로 큰 흐름을 주도하기보다는 강력한 리더의 지도하에 움직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자겸과의 협력으로 권력을 유지했고, 그의 승진 코스는 후대 무신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무신정변 이후 무신들이 척준경의 전철을 밟아 문관직으로 승진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이는 척준경이 무신정변과 무신정권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됩니다. 척준경은 뛰어난 무력과 전략적 판단으로 고려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남아 있으며, 그의 정치적 성향은 리더십보다는 충성을 바탕으로 한 행동주의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말년 유불리가 있는 정치적 행동들로 인해 존경받는 인물로 칭송되지는 않지만 전쟁 중 활약했던 일들은 정치적 성향을 넘어 그를 무신이라 언급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것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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